변호일기

국가보안법 법정에서 30년 만에 다시 만난 스승과 제자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20-10-30 조회수 : 382
1989년 4월.
87년 6월 항쟁 이후의 시기이긴 하지만, 반공을 주요 통치도구로 삼았던 군부독재의 기운은 걷히지 않은 때다. 이때는 전교조가 태동할 무렵이고, 피고인도 그 움직임에 함께 하고 있었다.
제천의 한 고등학교에 선생님으로 발령을 받은 피고인은, 분단을 끝내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북의 실상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학생들에게 일반에 공개된 자료들을 보여주며 설명을 한다. 그 과정에서 6 $25 전쟁으로 남과 북이 입은 피해, 그 이후의 복구과정 등의 이야기도 한 모양이다. 북한에 대한 이야기도 좀 나왔을 것이다.
수업을 듣던 반 60여명의 아이들 중 1명이 부모에게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6 $25는 북한의 남침이 아니라 미군의 북침으로 시작되었고,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산다고 했다”고 말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이 학생은 교실 맨 뒤에서 수업시간에 자기도 하는 등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던 학생이다. 그렇게 혼자서 산만한 와중에 잘못 들었을 수도 있다.
이 학생과 같이 어울리는 몇몇은 자신들도 수업시간에 그 이야기를 듣고 놀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나중에 그 중 한 명은 그 수업시간에 결석한 것으로 나오는데, 검사는 이에 대해 제대로 추궁도 하지 않았다.
어쨌든, 담임선생이 위 아이들 집으로 찾아와, 아이들을 데리고 경찰서로 가 조사가 시작되고, 피고인은 국가보안법위반(찬양고무)으로 구속되고, 언론에는 “학교 선생이 6 $25는 북침이라고 했다”고 대서특필 된다. 피고인은 선생님으로서 첫발도 제대로 내딛지 못한 상태에서 꽁꽁 묶여버리고 만 것이다.
같은 반 60여 명 중 일부(5~6명)를 제외하고는 피고인이 그 말을 하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고 주장하고, 학교 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시위까지 하며 피고인은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피고인이 정말로 “6 $25는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말하였다면, 엄청난 사건으로 학교 안팎에서 큰 반향이 있었을 터인데, 일부 아이 들었다는 시점 이후로 상당한 기간 동안 그런 반향은 없었다.
피고인이 “6 $25는 북침”이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하는 학생들 진술은, 앞서 본 결석한 아이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 말고도, 수사기관과 법정에서 “들었다”, “못 들었다”고 수시로 바뀌고, 자신이 들었을 때의 상황에 대해서도 “엎드려 있다가 들었다”, “옆 짝과 이야기하다가 들었다”, “교재를 만지다가 들었다”는 등 일관성이 없었다.
그럼에도 1심은 유죄 실형을 선고하였고, 2심은 유죄는 유지하면서도 집행유예를 하고, 대법원도 유죄를 확정했다. 1989년의 일이다. 피고인은 당연히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난 이 사건을 접하면서, 당시 검사, 판사들에 대해 법조인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정부가 들어선 후, 우여곡절을 겪어 복직은 했다. 그러나 형사 처벌의 누명은 벗어야했기에 재심 청구를 해, 재심개시결정을 받아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다.
2020. 10. 29.(어제) “피고인이 6 $25는 미군의 북침으로 시작되었다고 했다”고 말한 학생 2명이, 30년이 지나 다시 법정에 증인으로 나왔다. 다시 만난 선생과 제자의 얼굴에는 세월의 주름이 잡혀, 자세히 살펴보아야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지만, 감정은 30년 전 그대로다.
아이들은 30년이 지나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때 진술한 것이 맞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한 학생은 내 증인신문 막바지에 눈물을 글썽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다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싶었다. 난 “말하고 싶은 것이, 여기서 재판을 받고 있는 피고인의 억울함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30년 만에 다시 법정에 나와 증언해야 하는 증인의 억울함일 수도 있겠다”면서 말을 유도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다가, 여전히 눈물을 글썽이며 피고인에게 얼굴을 돌리고는 “선생님은 인터넷에서 다시는 학생들을 법정에 부르고 싶지 않다고 하셨으면서 왜 불렀느냐”고 따졌다.
바로 전에, 내가 “당시 피고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하고 자책감 같은 것이 있지 않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자책감이든 아니든 그때를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녀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무언가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내 신문에서 담임선생님이 집으로 찾아와 학생들을 데리고 경찰서로 갔다는 말도 했다. 이 사건은 학교장의 고발로 구체적으로 사건화되었다.
이어진 재판장의 신문에 그녀는 “경찰에서 진술서를 쓸 때, 간단하게 쓰면 자세히 쓰라 했고, 문맥도 맞지 않는 것 같으면 고치라고 했다”, "피고인 집에서 불온서적이 나왔다. 이 진술서는 형식적으로 쓰는 것이니 아무 문제 없다고 했다"는 말도 했다.
실제는 경찰이 그보다 더 심하게 간섭하였을 텐데, 그녀는 그 정도만 말했다. 이 정도의 증언만으로도 증거법적으로는 피고인에게 큰 도움이 된다.
정말로 기구한 인연이다. 분단을 정권의 도구로 삼은 자들 때문에, 스승과 제자는 30년이 지난 어제 만남에서도 맺힌 감정을 다 풀지 못하고, 어쩌면 또 다른 감정을 하나 더 얹고 헤어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어제 증인신문이, 그래도 어느 정도의 소득은 있었으니, 법정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은 다 못했지만, 서로의 감정이 풀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