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일기

어느 법정, 품격있는 재판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23-01-16 조회수 : 184

갑과 을은 오랜 기간 연인 사이로 있다가 헤어졌다. 헤어지고 난 후에도 몇 번 만났는데, 서울에 사는 갑이 다시 청주로 을을 찾아왔다. 을이 차로 갑을 픽업했는데, 갑은 차를 모텔에 세워놓자고 하였으나, 갑과 더는 같이 자지 않기로 한 을은 거절하였다.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밥과 술을 마셨다. 2차로 횟집을 갔다. 갑이 술에 취하고, 평소 갑의 술버릇을 아는 을은 술을 더 마시지 않았다. 갑은 을에게 지금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를 만나지 말라고, 주제넘은 참견을 했다. 나와서 노래방을 갔다.


갑은 계속 을에게 남자친구 만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을은 무슨 참견이냐며 맞섰다. 노래방을 나와 갑이 모텔에 가자고 했으나, 을은 거절했다. 갑은 도로 중앙으로 뛰어다니며 난리를 피웠다. 갑이 을의 핸드백을 갖고 있어, 할 수 없이 모텔에 따라갔다.


서로 말다툼하다가, 을이 핸드백을 갖고 모텔 객실에서 나가려고 하니, 갑은 의자를 가져다 출입문을 막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고는 피해자를 침대에 눕히고 강제로 성관계를 맺으려 했다. 을은 벗어나기 위해, 이로 갑의 가슴을 물었다. 갑은 행동을 멈췄고, 을이 밖으로 나가니, 갑도 따라 나왔다.


갑은 도로에서 다시 도망가는 을을 붙잡고 때렸다. 다행히 지나가는 순찰차가 있어 상황은 끝났다. 을은 경찰에서, 도로에서 있었던 폭행 건만 진술하고 강간 건은 말하지 않았다. 사귀던 사이이고, 그런 일이 밖에 알려지는 것이 수치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은 자신도 을에게 폭행당하였다며 경찰에서 진술하였고
, 어디서 cctv 영상도 구해 제출하였다. 을이 갑의 팔뚝을 치는 장면인데, 폭행이라고 할 것도 아니었다. 을은 분노했다. 무참하게 피해를 당했는데, 갑이 자신도 피해자라고 을을 처벌해달라고 하다니. 을은 변호사를 선임해 갑을 강간미수로 고소하였고, 갑은 상해죄와 강간미수죄로 기소되었다.


갑은 을을 강간하려고 한 적이 없다고 부인하였다. 가슴에 난 상처는 물린 것이 아니라 서로 몸싸움하다가 생긴 것이고, 모텔 객실 의자는 13kg이나 되어 자신이 이를 움직여 출입문을 막을 수 없다고 하였다. 피해자가 증인으로 법정에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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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은 많이 긴장했다. 누군들 법정에 가는 것이 긴장되지 않을까? 나도 전에, 10년이나 지난, 검사 때 사건 처리한 사건의 피고인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민사사건 증인으로 소환되어 3시간 가까이 피고인에게 시달린 적이 있다. 을에게 편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라 하였다. 말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말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하였다.


성범죄 법정은 비공개다. 피고인도 법정 옆 대기실에서 증인 신문 내용을 음성으로 듣는다. 방청석은 텅 비고, 판사, 검사, 변호사, 법원 직원, 피해자, 피해자 변호사만 있다. 법정 안이 마치 산사처럼 고요했다.


검사가 먼저 신문을 시작했다. 그 검사는 을을 충분히 배려하며 아주 요령 있게 신문했다. 유도신문이 아니라 피해자가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을은 말하면서 긴장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내가 이제까지 법정에서 본 검사 중 최고다. 그 검사를 바라보면서, 옛날 그 자리에 있던 내가 떠올랐다. 그는 기록 검토도 충분히 하고 나왔다. 사실 검사의 신문으로, 이미 결론은 났다고 볼 수 있었다.


이어서 갑의 변호인이 신문했다. 을의 진술을 탄핵해야 하는 입장인데, 피고인 입장에서 열심히 묻긴 하였지만, 결코 무례하지 않았다. 갑의 가슴에 난 상처가 물린 게 아니고, 모텔 객실 의자도 무거워 움직이기 어려웠지 않았느냐고 따졌으나 을은 차분하게 반박했다.


을은, ‘내가 이 사건 이후 갑을 본 적도 없는데, 내가 문 것이 아니라면, 그의 가슴에 상처가 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 ‘의자가 무겁긴 해도 번쩍 드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끄는 것인데 성인 남자가 그것도 못하느냐고 하였다.


평소에 말하기 좋아하는 판사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갑의 변소가 전혀 터무니없다고 보는 것 같았다.


을은 증언을 끝나고 먼저 나가고, 10분 정도 더 남아 재판을 지켜보다 법정을 나와, 을에게 전화했는데, 그는 울고 있었다. 난 다음 날, 피해자 대리인으로서 의견서를 냈다. 다음은 마지막 문장이다.


잘못했다는 진심 어린 반성 한 마디면, 그동안 둘 사이의 관계에 비추어, 그냥 끝났을 수도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피고인은 어리석게도, 그와 반대로, 피해자의 상처를 더 아프게 건드리며 키우고 있습니다. 피고인에게 그 죄에 상당하는 처벌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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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굳이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검사, 변호사, 판사 모두 무례하지 않고 을을 충분히 배려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다. 논리를 떠나서, 흔히 보기 어려운, 품격 있는 재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