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0-12-31 | 조회수 : 406 |
보은에서 상주시 화남으로 넘어가는 장고개까지 아들이 차로 태워다주었다(09:40). 지난주보다 크게 오른 기온이지만, 산 고개 바람은 찼다. 지난주는 쌓인 눈 때문에 길 찾는데 애를 먹었는데, 눈이 다 녹았다. 길 찾아가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약간의 오르막 후 평탄한 길이다. 해균이 말대로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이라, 걷는 발이 편안했다. 그런데 마음이 불편했다.
지난 밤 윤석열 총장 징계처분에 대한 집행정지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법원은 징계사유가 일부 인정되긴 하지만, 절차에 일부 하자가 있고, 정직 2개월의 징계 효력을 그대로 인정하면 나중에 윤 총장이 본안소송에서 승소하더라도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전날은 정경심 교수에 대해 징역 4년을 선고하는 판결이 나왔다. 강펀치를 연이어 맞은 터라, 산에 오르는 발걸음이 흔들렸다.
이날 산행을 마치고 본 것인데, 임종석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페이스북에 검사와 판사의 태도에서 ‘너무나도 생경한 선민의식과 너무나도 익숙한 기득권 냄새’가 난다고 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그들은 검사, 판사가 됨으로써 자신들에게 남다른 능력과 특권이 있다고 여긴다. 자기들이 세상의 주인이라,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에 대한 도전은, 쥐고 있는 칼과 방망이로 철저하게 억누른다. 이들 세력은 일제 때부터, 일제와 독재정권의 비위를 맞추며 남다른 능력과 특권을 누려왔다. 친일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업보는 이리도 질기게, 지금까지 에누리 없이 받는다.
그들을 누가 통제할 것인가? 공수처? 이것이 그들에겐 전에 없이 커다란 압박이 될 것이지만, 한계가 있다. 20명대의 검사 갖고 얼마나 대단한 수사를 할 수 있을까? 기존 검찰이 공수처 검사들에 대해 수사권을 갖는데, 그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기득권 우호세력인 언론도 공수처 흠집 내는데 혈안이 될 것이다. 이런 난관들을 헤치고, 공수처의 취지를 살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일각에서 말하는 것이 배심제의 전면 도입이다. 지금의 국민참여재판은 배심원단의 평결에 기속력이 없어, 판사가 그와 달리 판단할 수 있다. 2008년 법이 시행될 때, 입법자들은 5년간 시행해 보고, 배심원단의 평결에 기속력을 줄지 말지를 정하자고 했는데, 그들은 그 5년이 지나 10년도 더 넘도록 그런 기속력을 주지 않고 있다. 배심원이 되는 일반 시민들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아니, 시민들에게 그런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판사, 검사, 국회의원들의 기득권이 무너지니까.
난 서울중앙지검 국민참여재판 1호 검사였다. 2008년 법이 시행되기 전부터 모의재판(이때 내가 검사역을, 금태섭 전 의원이 변호사역을 했는데, 전국에서 모여든 참여재판 전담 판사, 검사, 각 언론사 기자들로 서울중앙지법 대법정이 가득 참)을 하고, 다른 검사 9명과 함께 미국 뉴욕에 가 배심재판을 처음부터 끝까지 참관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이론적, 실무적으로 준비를 많이 했다. 이런 노력으로, 2008년 6월 17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처음 열린 국민참여재판에서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으로부터 "여태 본 재판의 검사 중에서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https://news.v.daum.net/v/20080620122709926]
이런 경험들도 바탕이 되어, 난 그 이후 배심원단의 평결에 기속력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 왔다. 그런 기속력이 주어지면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다. 엘리트 법관들만 할 수 있다고 세뇌당해 온 재판을, 일반 시민들이 지혜를 모아 할 수 있다니, 시민들의 주권의식은 크게 오르고, 학교교육이나 가정, 직장에서도 배심원들이 토의하듯 서로 의견을 나누는 문화가 생겨날 것이다.
이런 문화 속에서 법조인들의 불합리한 권위는 무너져 갈 것이다. 자신이 무슨 신의 영역에라도 있는 듯, 개인적인 감정에 사로잡혀서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양형을 하고, 판결을 선고하고는 소감까지 물으며 확인사살을 하는 행태는 없어질 것이다.
난 나의 혼자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과정에서, 바뀌는 경험을 수도 없이 한다. 판사 1명이 하는 재판은 이런 오류를 걸러낼 수 있는 기회가 없다. 합의부 재판부라 해도, 재판장 또는 주심의 의견이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있다. 배심원단에서는 쟁점마다 돌아가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대부분은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그동안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단의 평의 결과가 90% 이상 그대로 판결로 이어진 것도 이 때문이다.
실질적이고 최종적인 검찰개혁, 사법개혁은 배심원단의 평결에 기속력을 주는 것이다. 앞으로 국회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본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 보니, 동관음고개에 다다랐다(10:50). 따스한 햇볕을 등지고, 햇빛을 받아 더 희게 빛나는 작은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고, 보이차를 마셨다. 그 사이 트럭 한 대가 살짝 눈이 쌓인 고갯길을 힘겹게 넘어갔다. 그 차가 지나가니 다시 혼자다. 혼자 산행이 무서울 것도 같지만, 막상 발을 들여놓으면, 미리 느꼈던 두려움은 기우인 것이 대부분이다. 새로 가는 길에서 경험하는 약간의 긴장과 그것을 이겨낸 뿌듯함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자연에서 배우는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일상을 살아가는데 큰 에너지가 된다.
동관음고개에서 조금 오르니 커다란 바위산이 앞을 가로막는다. 우회길을 따라 한참 오르다가, 커다란 바위 사이로 좁은 길을 빠져나가게 되었다. 몸을 뒤척거리며 좁은 틈을 빠져나가다 하늘을 바라보니, 허연 바위 뒤로 펼쳐진 하늘빛이 엄청 파랬다. ‘이게 파란색이다’라고 시위라도 하는 듯했다. 짙푸른 하늘과 허연 바위가 대조를 이루며, 멋진 모습을 연출하고 있었다. 이런 걸 보는 게 산행하는 맛이지. 가끔씩 이미 지나온 긴 구병산 능선을 뒤돌아 바라보는 재미도 있었다.
충북알프스와 백두대간이 만나는 못제에 이르렀다(11;40). 꽤 큰 웅덩이가 있는데(오륙백평 된다고 함), 비가 오면 연못이 될 것이다. 충북알프스 길 쪽으로는 두릅나무가 많았다. 내년 봄 두릅나무 순은 어느 산군의 차지가 될지. 연못 건너편 백두대간 길 쪽에는 표지판에 못제의 전설과 못제를 기리는 시가 적혀 있었다.
옛날 상주에서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과 보은군 호족인 황충 장군이 싸웠는데, 견훤이 싸우는 족족 이겼다. 황충이 견훤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살펴보니, 이곳 못제에 와 목욕을 하기 때문이었다. 황충이 소금 삼백 가마를 못제에 부었고, 그 후론 견훤이 힘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문장대 쪽에 견훤산성이 있는데, 한번 꼭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표지판에 적힌 ‘못제’라는 제목의 시를, 산 속에서 혼자 소리 내어 읽었다.
후백제를 호령하던
견훤의 그 기상
천년의 세월 속에
메아리쳐 들려오고
백두대간 능선 위의
유일한 연못
못제에 서려있는
견훤의 전설이 전해온다.
못제 고인 물에
패장 견훤의
한 많은 자취가
보일 듯 말 듯 하고
연못 속에 자란
습지 풀은
한탄의 숨결을 위로하려는 듯
바람에 흐느적거린다.
천년의 왕조가 무너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가는데
하물며 당대의 왕조가 무너짐은
손바닥 뒤집기와 같음일세.
깊어가는 가을날
기우는 석양을 바라보니
애잔한 견훤
역사의 순리를 되새기게 하고
지나던 산객의 마음을 어지럽게 한다.
역사가 승자의 몫이고 보면
패자에게 보내는 연민의 정이
투영되어 나온다.
갈령삼거리(12:32)에서부터 형제봉 가는 길에는 진달래 군락지가 있다. 키가 엄청 큰데, 전에도 그곳을 지나며 생각한 것이지만, 진달래 철에 꼭 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제봉(832m)에선 바람이 무척 세고 찼다(13:10). 다음에 가야 할 속리산 천왕봉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상주시 화북 쪽으로는 청계산, 도장산이 근육질을 뽐내며 우람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곳도 언젠가 가야할 곳이다. 갈 수 있는 산이 무궁무진하니, 어찌 행복하지 않은가. 형제봉에서 피앗재로 내려가는 길에도 진달래 군락지가 있었다.
피앗재에서(13:50) 능선 종주를 마치고, 왼쪽 만수리로 하산했다. 거의 다 내려와, 눈 쌓인 곳이 있기에 부드러움을 느끼려고 발을 딛었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얼음 바닥이었다. 피앗재산장에서(14:18) 머뭇거리니, 아는 주인장이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코로나만 아니면 그곳에서 막걸리 한 잔 하였을 것이다. 다음은 피앗재에서 천왕봉을 거쳐 문장대까지 갈 생각이다. 만수리로 나를 데리러 온 아들 녀석은, 다음에 같이 갈까 말까 한다. 격주로 한 번은 같이 가기로 했었다나 어쨌다나.
일시 : 2020. 12. 25. (금) 맑음
코스 : 장고개 ~ 동관음고개 ~ 못제 ~ 갈령삼거리 ~ 형제봉 ~ 피앗재 ~ 만수리 (4시간 40분 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