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기

울 엄마 시집가던 길 (3)

작성자 : 관리자 등록일 : 2021-02-23 조회수 : 277

멧돼지를 만나다.  

봉황리에서 달천을 건너, 이승칠 공적비에서 산행을 시작했다(09:40). 이승칠은 사헌부 감찰직에 있다가, 1912년 일본 황제가 사망 후 백성들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하자, 이를 거부하며 내북면 봉황대에서 투신 자결하였다 한다. 이 분의 기개를 생각하니, 현재의 검사, 판사들의 이기적인 태도와 대비되었다. 계곡을 따라 산책길이 짧게 있었다. 가지능선을 타고 천천히 올랐다. 서두르지 않고 한 호흡도 놓치지 않고 오르려 했다. 능선에 오르니 사람 길이 나 있다(10:05).

 

왼쪽 아득하게 먼 곳에 국사봉이 보였다. 언제 저기까지 가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젠 사람이 거의 만날 수 없는 깊은 산 속을 혼자 걷는데 조금은 익숙해진 것 같다. 작년 충북알프스를 시작하면서 들었던 두려움이 조금은 옅어졌다. 그래도 두려움이 다 사라지지는 않는다. 가장 큰 것이 멧돼지를 만나는 것이다.

 

잠시 쉬면서 차 한 잔 마시고, 바닥에 떨어진 신갈나무 잎을 그려보았는데, 쉽지 않았다. 시간을 많이 들일 수 없고, 나뭇잎이 바람에 날렸다. 그래도 잠시라도 잎에 집중하여 관찰하면 몰랐던 것들을 새로 알게 된다. 나뭇잎의 가지가 어떻게 갈라지고, 가지 사이에는 어떻게 선이 만들어지는지 등. 아무리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이라도 자세히 살펴보면,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아내게 된다.

 

왼쪽으로 도원저수지로 이어지는 고개를 지나 경사가 심한 곳을 오르게 되었다. 오른쪽엔 은빛 자작나무 숲이 있었다. 자작나무를 보면 언제나 새롭다. 은빛 색깔이 마치 물고기 비늘 색깔을 보는 것 같다. 산에서 바다를 보는 것 같아, 새로운 것일까? 자작나무 숲을 등지고 오르는 길은 힘들었다. 중간 중간 잠시 쉬면서 호흡을 골랐다. 한 호흡도 놓치지 않으리라는 다짐은 어느새 무너진 것 같았다. 가쁜 호흡과 서둘러 올라가야겠다는 조바심이 호흡 관찰을 방해하였다. 서두르면 지는 것인데.

 

12시가 넘었다. 전에 한 번 지나간 한남금북정맥 길을 만난 다음에 점심을 먹기로 하고, 발걸음을 바쁘게 움직였다. 오늘 진행 방향은 북진, 서진, 남서진인데, 남서진 길에 접어들면서, 내가 지나온 길이 어느새 아득하게 보였다. 처음 능선에 올라 바라본 국사봉 쪽에서, 이번엔 처음 올랐던 능선을 바라보며, ‘참 많이 걸어 왔구나’, ‘사람의 발걸음은 대단하구나하는 생각을 하였다. 연달아 오뚝 서 있는 봉우리들이 멋지게 보였다.

 

배가 고프고 다리도 지쳐 잠시 마음이 흩어진 사이, 어디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내 왼쪽으로 2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뭔가가 달려가고 있었다(12:35). 멧돼지 새끼였다. 4마리였는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달렸다. 혹시라도 나에게 달려오지 않을까, 잔뜩 긴장되었다. 그들이 지나간 후, 뒤에서 소리가 나면, 혹시 그 돼지들이 나에게 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산행을 한 지 오래 되었지만, 멧돼지를 만난 것은 처음이다. 시간이 지나니, 처음의 두려움은 가시고, 이내 얼굴에 미소가 생겼다. 멧돼지를 처음으로 만난 반가움, 멧돼지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구나 하는 안도감 때문일 것이다.

 

1시가 다 되어서야 한남금북정맥 갈림길에 닿았다(12:52). 이제부터는 전에 반대방향에서 한번 지나갔던 길이라 마음이 훨씬 더 편안한 상태에서 갈 수 있었다. 따뜻한 햇볕을 쬐며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일어났다. 이날은 피반령까지 가기로 하였으나, 시간상 도저히 어려워, 중간에 쌍암재로 빠지기로 했다. 걷다 보니, 쌍암재까지 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듯했다. 자주 시계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국사봉을 지나(14:00) 살티재에 닿았는데 벌써 3시가 다 되었다(14:55). 마음이 급해졌다. 살티재에서 전에 청주로 산악회에서 함께 가며 붙여 놓았던 표지기를 찾았으나 없었다.

 

중간에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을 한 명 만났다. 그는 쌍암재에서 오는 것이라 했다. 좀 길을 잃었는데, 큰길로 빠지는 데까지 얼마나 더 가야 되는지 물었다. 한남금북정맥을 따라 추정재로 빠져야 하는데 1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다. 전혀 사람이 없을 것 같았는데, 사람을 만난 것이 신기했다. 산길에는 그늘진 곳에 눈이 쌓여 있다. 그런데 계속 가도, 눈 위로 아까 만난 사람의 발자국이 없었다. 발자국이 없으니 순간 무서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참을 지나 눈 가장자리에 살짝 걸친 발자국을 두어 개 발견하였으나, 그 사람이 어떻게 길을 걸어왔는지 지금도 의문이다.

 

산은 일정한 맥을 따라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백두대간이 가장 큰 맥이고, 큰 강의 울타리가 되는 정맥, 기맥이 있고, 다시 여기서 뻗어 나온 수많은 지맥이 있다. 단군지맥(팔봉지맥)은 한남금북정맥에서 갈라져 피반령을 지나간다. 바꾼 계획대로, 단군지맥 분기점에서 왼쪽 쌍암재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16:50). 다음에 이곳에서 단군지맥을 따라 문의까지 가면 울 엄마 시집가던 길은 다 간다. 어둑해지는 산길을 서둘러 내려서는데, 꽉 찬 하루가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새터고개에서 내려서 찻길로 접어들어 아들을 불렀다(17:20). 길에 주저앉아 바라보는 보리밭의 푸르름이 시원했다. 7시간 40분 걸린 긴 산행이었다.

 

일시 : 2021. 2. 20.() 맑음

코스 : 봉황리 이승칠 공적비 ~ 국사봉 ~ 살티재 ~ 단군지맥 분기점 ~ 새터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