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5-05-23 | 조회수 : 22 |
오르면 미남이 되는 미남봉
지금 이 글을 쓰는 우리 집 다락방에선 작은 창문을 통해 미남봉이 보인다. 미남봉은 마당에서도 사방을 둘러보다가 눈이 딱 멈춰지는 곳이다. 왼쪽에서 완만하거나 평평한 능선이 이어지다가 미남봉으로 우뚝 솟은 다음 오른쪽으로 급하게 내려서는 모양이 멋지기는 하다. 그 모습에 이끌려 두 번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번엔 누구도 다녀가지 않은 눈을 푹푹 밟고 다녀왔다.
2025. 2. 8.(토) 맑음.
아침 기온이 영하 17도다. 이 추위를 뚫고 제대로 산행할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더구나 이날 가는 길은 정규 등산로도 아니다. 칠보산악회 회원 6명은 8시 조금 넘어 활목재에서 철조망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 산행을 시작했다. 활목재는 충북 보은군 산외면과 경북 상주시 화북면의 경계다.
산엔 온통 눈이 깔려 있었다. 어떤 곳은 바람에 쓸려 온 눈이 수북하게 쌓여 무릎 반 정도까지 빠지기도 했다. 스패츠와 아이젠을 차 눈길을 헤쳐나가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정규 등산로가 아니라, 예상대로 사람 발자국은 전혀 없었고, 간간이 짐승들이 돌아다닌 흔적만 보였다. 길을 제대로 찾아갈 수 있을지 긴장되었다.
중간중간 표지기가 나와 그나마 길을 안내해 주었다. 멧돼지가 지나간 발자국도 길을 찾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작은 능선을 따라가는데 앞쪽으로 뾰족한 봉우리가 보였다. 미남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 시작되는 곳이다. 그 봉우리 왼쪽으로 우회하여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주능선에 올라야 하는데 두툼하게 쌓인 눈길이라 그렇게 올라가는 지점을 찾기 쉽지 않았다.
경사가 좀 급하더라도 눈이 쌓여 있지 않다면 등산화 바닥의 마찰력으로 딛고 올라갈 수 있는데 눈 위는 그렇지 않았다. 손으로 두껍게 쌓인 눈을 치우고 발 디딜 곳을 만들고 올라가야 한다. 내가 맨 앞에서 그렇게 주능선에 오른 다음 밧줄을 드리워 뒤에 오는 사람들이 붙잡고 오르게 하였다. 눈 산행에서는 밧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곳에 드리운 밧줄은 거두지 않고 그냥 놓아두었다.
주능선은 좀 과장되게 표현해 칼날능선이었다. 그만큼 양쪽의 경사가 심하고 깊었다. 아주 조심스럽게 앞서와 마찬가지로 발 디딜 곳을 확보하며 오르막을 올랐다. 또 한 번 밧줄을 드리웠는데 여기서는 다음번 사용을 위해 밧줄을 거두었다. 바로 미남봉(656m)이 나왔다. 나무들 때문에 시야가 막혀 우리 집이 잘 보이지 않았다. 미남봉에 오르기 전 시야가 트인 능선길에서 보아야 하는데 그 능선길을 지나쳐 능선에 오른 모양이다.
미남봉에 오르니, 이제 위험한 곳은 다 지난 것 같아 마음이 크게 놓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따뜻한 홍차와 연태고량주 몇 잔을 마셨다. 이날도 나랑 민비 님이 선두에 섰는데, 몹시 추운 날이고 길이 험한데도 뒤에서 잘 따라와 주어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특히 성호가 맨 뒤에서 송 대표를 잘 챙겨주었다. 산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미남봉이란 산 이름을 놓고 누가 미남이니 아니니 하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제천 쪽에 가면 미인봉이 있는데 그곳의 원래 이름은 저승봉이었다. 이름이 무시무시해 미인봉으로 바꿨다고 한다. 미남이나 미인이어서 미남봉이나 미인봉에 가는 게 아니라, 미남봉과 미인봉에 가벼운 마음으로 땀 흘리며 오르면 누구나 미남과 미인이 된다. 산은 그런 마력을 가졌다. 이 마력을 믿고 따르는 자, 평생 몸과 마음이 건강할 것이다. 일행 모두 낯설고 긴장되는 눈 산행을 즐겼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미남봉에서 한참 내려가고 긴 능선길을 걷다가 다시 한번 가파른 오르막을 넘고 나면 드디어 정규 등산로가 나온다. 11시가 넘어 배가 고팠다. 민비 님이 사과 조각을 주고 옥수수 라떼를 따뜻하게 타 주어 허기를 달랬다. 뒤이어 온 성호에게 그의 아내인 현경이가 싸 준 김밥을 내놓으라고 하여 다 함께 네 줄이나 먹었다. 나중에 페이스북에서 보니, 성호는 그 김밥이 처가 아닌 처제가 싸준 것이라고 했다. 추운 날씨 탓에 정규 등산로를 지나는 사람도 다섯 명 정도밖에 보지 못했다.
다시 오르막으로 발걸음을 내디디었다. 몇 걸음 나간 후 뒤돌아보니 후미가 벌써 멀어졌다. 산행시간이 예정보다 길어질 것 같았다. 2023년 2월 18일 충북알프스 산행을 시작하면서 시산제를 지낸 곳에서 다시 시산제를 지내려고 했는데 찾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운흥리에서 토끼봉을 거쳐 오르는 상모봉 부근은 전망이 아주 좋은데, 후미를 기다렸다가 그곳을 보여주었다.
민비 님은 그새 앞서가 상학봉까지 갔다가 돌아오고 있었다. 김상수 사무장은 다리가 좋지 않은 듯 가끔 주먹으로 허벅지를 치면서도 꿋꿋하게 잘 올라갔다. 비로봉을 지나 다음 봉우리에 오르기 직전 탐방로 왼쪽으로 벗어나면 조금 긴 굴이 나온다. 작년 친구들과 이곳에서 비박을 했었는데 그때 봉우리에 올라 일몰과 일출, 밤하늘 별을 보던 일이 떠올랐다. 이날 시산제는 이 봉우리에서 지냈다.
상학봉, 관음봉, 문장대, 청화산을 바라보고 제단을 차렸다. 파란색 천을 까니 사람들이 주변과 잘 어울린다고 했다. 제단에는 음식 말고도 내가 최근 쓴 ‘속리산이 되리라’라는 책도 올리고 이날 산행에서 큰 도움을 준 밧줄도 올렸다. 산행으로 자연과 하나 되면서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그 깨달음으로 인간 세상에 나가서도 주변과 조화롭게 살게 해 달라고 속리산 신령께 빌었다. 다들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이런 시산제를 통해 마음이 한결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송 대표가 부침개와 문어 튀김 등 맛난 먹거리를 준비해와 모두를 즐겁게 해 주었다. 송 대표에게 너무 무리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니 다음에는 구운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해 주겠다고 하였다. 어쨌거나 산에서는 먹는 재미가 두 번째라면 서러울 일이다. 하산 길에서는 내가 잠시 길을 헤맸는데 김 사무장이 앞장서 잘 내려갔다. 비닐포대 엉덩이 썰매도 잠깐 타는 재미도 누렸다. 다 내려오니 어느새 5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8시간 30분가량 걸렸다. 고되었는지, 집에 돌아와 씻고 따뜻한 방에 누우니 온몸이 녹으면서 금세 잠들었다. 즐거운 산행을 함께해준 분들이 고맙다. 성 팀장님 부부는 결혼 30년이라는데 중국 여행을 잘 다녀오시기 바란다.
(2025. 2. 9. 11: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