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5-06-26 | 조회수 : 3 |
빗속에 함박꽃 은은한 향을 맡으며 한 봉정암 산행
얼마 전 충북참여자치시민연대가 아주 놀라운 광고를 냈다. 1박 2일로 백담사에서 봉정암, 대청봉을 다녀오는 산행을 기획하며 20명을 공개 모집한 것이다. 이틀이란 시간과 낯선 사람들과의 산행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잠시 고민하였으나 색다른 산행의 매력에 이끌려 바로 지원했다. 모두 17명이 빗속에 함박꽃 은은한 향을 맡으며 꿈 같은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2025. 6. 20.(금)
새벽 4시 청주체육관 앞에서 모여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그때부터 비가 조금씩 긋더니 설악산에 가까워지면서 빗줄기가 많아졌다. 그 비를 맞으며 제대로 산행할 수 있을지 차 안에서부터 걱정이었다. 버스가 도착한 용대리부터 백담사까지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미니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 이 버스를 타기 전 모두 스패츠를 차고 우비를 입었다. 비는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산행에 나서는 사람은 우리 말고 네다섯 명이 전부였다. 백담사 입구에서 간단히 몸을 풀었다. 비를 뚫고 무사히 산행할 수 있을지 긴장되었다. 일행 중에는 산에 자주 가지 않아 걱정하는 분도 꽤 되었다. 내가 맨 앞에서 서고 진화 스님이 맨 뒤에 섰다.
스님은 25년 정도 만에 오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번에 봉정암 숙박비를 후원하셨다. 난 30여 년 전 같이 절에서 사법시험 공부하던 사람들 3명과 함께 설악동에서 오르다가, 대전의 한 절에서 단체로 봉정암에 가던 무리를 만나 그 무리와 함께 봉정암에서 하룻밤 자고 백담사 쪽으로 내려온 적이 있다. 그 무리 중에 내 나이 또래 여자가 있었는데 산행 중 우연히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까워져 그 무리의 일행이 되어버렸다. 그땐 봉정암에 사람들이 엄청 많아 앉은 채로 자야 할 정도였는데, 다음 날 아침에는 대전의 무리와 일정을 맞추지 못해 아쉽게도 산행을 더 같이하지 못했다.
산행 초반의 길은 계곡(영실천)을 따라 완만하였다. 그동안 가물고 비가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계곡에 물이 얼마 되지 않았다. 우비에다 신발 안에 비가 들어가지 못하게 스패츠까지 찼지만 아직 더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르막을 오르기 시작하면 몸에서 열이 날 텐데 그땐 어떻게 견딜지 크게 걱정되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는데 사람들이 잘 따라오고 있었다. 일행이 많고 산행 실력도 편차가 있을 것이라 여기고 비교적 천천히 가고 있었는데, 이번 산행을 기획한 최진아 국장이 다가와 “후미에서 속도를 좀 더 내달라고 한다”고 전했다. ‘언제까지 그럴까’라는 의문이 들면서도 요구대로 속도를 올렸다. 도중에 한 번 쉬었는데(09:50), 거기서부터 “영시암까지는 쉬지 말고 쭉 가자”는 말도 나왔다.
영시암에 닿을 때는 비가 더 세어졌다(10:17). 긴 전각의 처마 밑으로 긴 마루가 있어 그곳에 앉아 비를 피하며 간단히 요기하였다. 난 좀 더 쉬며 호흡을 가다듬은 뒤 가려고 하였으나 오도경 님이 오래 쉬면 더 힘들다면서 빨리 가자며 재촉하였다. 오도경 님은 산행 내내 일행의 중간에서 다른 사람들을 챙기는 등 윤활유 역할을 아주 잘 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렴동 대피소에 닿았다. 앞으로 봉정암까지 비를 피할 곳이 없어 대피소에서 찰밥과 절편으로 점심을 먹었다. 요즘은 대피소에서도 술을 먹을 수 없다.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우비에 갇힌 몸에서 땀이 무자비하게 났다. 몇몇은 차라리 비를 맞는 게 낫다면 우비를 벗어버렸다. 일행의 간격이 조금씩 벌어졌다. 맨 앞에서 적당한 시간 간격을 두고 멈춰서 후미가 다 오는 것을 확인한 후 다시 출발하는 방식으로 산행을 이어갔다. ‘속도를 내자’, ‘쉬지 말고 쭉 가자’던 초반의 기세는 사라졌다. 그래도 누구 하나 처지지 않고 힘을 다해 일행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하였다. 옛날 빨치산이 그랬을 것처럼.
함박꽃이 자주 보였다. 목련꽃과 비슷하여 ‘산목련’이라고도 하며, 북한에서는 ‘목란’으로 부르는데 1991년부터 북한의 나라꽃이 되었다고 한다. 그 향이 무척 은은하여 생꽃 그대로 찬 물에 우려 마셔도 좋다. 한여름에 한두 달 피고 지기를 되풀이한다. 여름 산행에서 멋진 자태와 향으로 산꾼을 유혹하는 함박꽃을 난 무척 좋아한다. 산의 고도가 높아질수록 함박꽃나무는 더 많아졌는데 군락지를 지나면 공기 중에 향기가 그윽하였다. 일행 중에는 이 함박꽃에 대해 아는 이가 거의 없어 내가 가끔 설명하고 향도 맡게 하였다. 이번 산행에선 내게 세 가지 중요한 감흥이 있었는데 그 첫 번째가 이 함박꽃이다.
계곡을 따라 크고 작은 폭포가 이어졌다.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떨어지는 것도 있었다. 계곡물은 옥빛을 띠었다. 초록의 옥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옆에 가는 분에게 그것을 가리키며 감탄하니, 그녀는 “주변의 초록 나뭇잎과 풀이 물속으로 빨려들어가 그런 빛을 만들어 냈다”고 하였다. 순간적으로 그런 표현을 해내는 것이 놀라웠다. 바위산의 웅장한 자태도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흙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엄청나게 넓은 바위산 경사면에 소나무 등이 뿌리를 박고 ‘우린 이런 조건에서도 당당하게 산다’며 생명력을 뽐냈다.
쌍용폭포가 눈에 들어왔다(13:10). 우리가 가던 계곡에서 가장 큰 폭포다. 이름 그대로 두 개의 폭포가 나란히 흘러내렸는데, 오른쪽 폭포는 높고 길었고, 왼쪽 폭포는 그보다 낮고 짧지만 수량은 더 많았다. 우리가 다음날 내려올 때는 그 사이 내린 비로 폭포는 더 웅장한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이미 꽤 지친 어느 분은 그 폭포의 감흥보다는 앞으로 얼마나 더 올라야 할지 걱정하고 있었다. 이젠 진짜 급한 오르막인데 그 걱정을 바라보는 나도 걱정되었다.
이번 산행에서는 맨 앞에서 주로 박후열 님과 둘이 이야기를 나누며 갔다. 산행 경력이 상당한 분인데 쌍용폭포에서 봉정암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길을 거뜬하게 올라갔다. 좀 평평하고 통나무 의자가 있는 곳에서 일행을 기다리며 쉬려고 하였으나 심한 바람에 추워져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봉정암은 궂은 날씨 때문에 한산했다. 공양간 앞에서 배낭에 넣고 올라간 3kg 쌀을 꺼내 그곳 관계자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어떻게 매고 왔냐”며 다소 놀라는 표정이나 쌀은 이미 공양간에 그득했다. 헬기로 가져오는 것인데 그곳에서 돈으로 사 법당에 공양물로 올리는 모양이었다. 절에서는 그런 식의 돈이 더 필요하지, 나같이 작은 포대로 지고 오는 것은 그리 반가워할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생각보다 늦게 일행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마지막 할딱고개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 오도경 님이 더 늦기 전에 대청봉에 가자고 했다. 봉정암엔 바람이 무척 세었다. 그곳에 사는 거사님이 대청봉에 가려는 우리를 보고 대청봉은 바람이 더 세 사람이 날아갈 정도일 것이라고 했다. 걱정이 되어도 6명이 나섰다(15:00). 남자 셋, 여자 셋. 비바람은 더 거칠어지는 것 같았다.
봉정암부터 가파른 오르막이다. 계단길이 끝날 무렵 뒤에서 여자들은 가지 않기로 했다는 말이 들렸다. 마음 한쪽에서는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잠시 후 뒤를 돌아보니 김혜란 국장이 바로 따라오고 있었다. 평소 산행, 마라톤으로 단련된 몸이니 이런 중요한 순간에 빠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김 국장은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고도가 높아지니 아래서는 못 보던 꽃들이 나왔다. 초록의 산에서 앙증맞게 노란색으로 피는 마타리는 언제봐도 반갑다. 배롱나무 비슷한 꽃이 보여 검색해 보니 정향나무다. 향기가 진하다. 함박꽃 향은 단아하게 은은한데 정향나무 향은 요염하게 노골적이다. 다른 꽃들도 더 있었는데 비바람 속 급한 마음에 제대로 살피지 못했다. 너마나도 아쉽다.
소청대피소를 지나고도 가파른 오르막이 지루하고 힘들게 계속되었다. 가끔 뒤를 돌아보았는데 모두 잘 따라오고 있었다. 소청봉에 가까워져서는 비바람에 완전히 노출된 나무계단을 올라야 했다. 거칠고 강한 비바람을 그대로 다 맞아야 했다. 몸이 흔들리기도 했다. 우리를 걱정했던 봉정암 거사님이 떠올랐다. 그 거친 속에서 잠시 쉬면서 간단히 요기도 하고 물도 마셨다. 그 쯤인가, 김 국장이 내게 “변호사님, 우리 가도 괜찮은가요?”라고 물었다. 확신할 수 없으니 “갈 수 있는 데까지 가 보자”고 했다.
드디어 대청봉에서 공룡능선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에 올랐다. 길이 좀 완만해졌다. 사방은 비와 안개로 꽉 막혔다. 가시거리가 백미터도 되지 않았다. 김 국장이 공룡능선을 볼 수 없는 걸 통탄했다. 강한 비바람은 여전했는데 가다 만나는 중청대피소가 있으니 마음이 아주 무겁지는 않았다. 그런데 중청대피소는 폐쇄되고 아직 새 공사도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기댈 곳이 없었다. 비바람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60여 미터 앞에 뭔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었다. 이 악천후에 우리 말고도 대청봉에 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우리보다 젊었다. 그들도 비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들을 추월했다. 중청봉 대피소부터 대청봉까지는 비바람을 피할 곳이 전혀 없어 몸으로 다 받아야 했다. 오르막을 오르는 힘듦보다는 강한 바람에 맞서면서 무사히 정상에 다녀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앞섰다.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다행히 길 양쪽으로 나무와 밧줄로 된 울타리가 있어 그것을 붙들고 갔다.
그렇게 올라가 만난, 빨간 색으로 “대청봉”이라고 쓴 정상 표지석에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16:20). 내 오래된 산행 경험에서도 가장 뿌듯한 순간이었다. 한 명씩 돌아가며 사진을 찍는 데도 거센 바람은 우릴 가만두지 않았다. 김 국장은 두세 컷을 찍었는데도 “표정이 잘 나오지 않았다”면서 더 찍어달라고 했다.
우리가 추월했던 다른 사람들이 올라왔다. 오도경 님은 그들에게 부탁해 넷이 같이 찍자며 일행을 모았는데 강한 바람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오도경 님 안경이 날아갔다. 나와 둘이서 주변을 한참 살폈으나 찾지 못했다. 다행히 안경이 없어도 산행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내려가는 길도 쉽지 않았다. 박후열 님은 반반지를 입어 맨살로 비바람을 맞아야 했고 안경까지 써 더 애를 먹었다. 바람에 날려 우비를 벗었던 오도경 님과 김 국장도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내려가 우비를 다시 꺼내 입었다. 커다란 성취를 안고 돌아오는 마음에 내려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러나 비는 조금도 멈출 기세가 아니었다. 소청대피소에서 잠시 쉬는데 김 국장이 머리가 뽀개질 듯이 아프다고 했다. 대피소 직원에게 가 진통제를 구하니 없다고 했다. 나도 내려가는 길에 기침이 두어 번 나왔다. 감기 징후인데 이런 때일수록 몸에 힘을 빼고 깊은 호흡을 해야 한다. 다행히 봉정암 저녁 공양 시간을 맞출 수 있었다. 이렇게 대청봉에 다녀온 것이 이번 산행에서 내 두 번째 중요한 감흥 포인트다.
봉정암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 있다. 해발 1200미터가 넘는 곳에 그렇게 탑을 세우고 절까지 지은 것인데, 불자들에게는 우리나라 제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사시사철 사람이 끊이지 않을 터인데, 우리가 간 날은 평일에 비바람도 강해 우리 말고 두어 팀이 더 있을 뿐이었다.
7시부터 저녁 예불이 시작되었다. 진화 스님이 내 쌀 공양물까지 챙겨 주셨다. 법당(적멸보궁) 입구 기둥에는 “入此門來 莫存知解”라는 주련이 있다. “이 문에 들어서서는 알음알이 내지 말라”는 뜻이다. ‘내가 뭘 안다’, ‘내가 잘났다’ 이런 마음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모은 불경은 ‘여시아문(如是我聞)’으로 시작된다.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아니라 ‘내가 이와 같이 들었다’는 것이다. 전자가 절대적이라면 후자는 듣는 사람에 따라 다른 상대적이다. 선입견이나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에 선입견과 편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법당이 무척 넓었다. 그 큰 법당의 정면은 통유리로 완전히 트였다. 그 유리를 통해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 보인다는데 난 그것까지는 신경 써 살피지 못했다. 그곳에서 사리탑을 챙겨 보지 못하였어도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을 봐 조금도 아쉬움이 크진 않다. 모진 비바람이었다. 빗줄기가 강한 바람을 타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파도처럼이 끊임없이 날아갔다. 그 뒤로는 바위산이 펼쳐져 있다. 소리도 요란했다. 그 난리에 봉정암이 무사할까 하는 괜한 걱정이 다 들었다. 이것이 내 세 번째 감흥 포인트였다.
바깥의 엄청난 소란을 통유리로 막아놓고 법당 안에서는 그곳 스님의 집전으로 1시간 반 가량 예불을 이어갔다. 천수경을 독송하고 온갖 부처님을 부르며 백팔 배를 하고 또 ‘석가모니불’을 염송하여 백 배가 훨씬 더 넘는 절을 했다. 가지런한 몸과 자세로 절을 했지만 바깥 날씨처럼 마음은 흔들렸다. ‘죽기 전에 쳇바퀴처럼 되풀이되는 고통을 다 덜어낼 수 있을까’, ‘부처님 공부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확신은 없어도 물드는 느낌은 있었다. 그것이 봉정암의 기운인 것 같았다.
낯선 환경과 예민한 성격에 밤새 뒤척이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칸막이로 된 건너방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 김 국장일 것이다.
2025. 6. 21.(토)
새벽 예불은 3시부터다. 뒤척이며 게으름피우다가 목탁 소리 몇 번에 일어섰다. 그 시간에 일행 두 명은 대청봉에 다녀온다며 헤드랜턴을 끼고 나갔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법당에서 예불하는 사람은 전날보다 적었다. 아직 어두워 통유리 바깥 풍경을 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이날도 전날과 마찬가지로 108배를 하고 석가모니불 염송을 하며 절을 했다.
예불을 마치고 바깥으로 나가려는데 그곳에서 일하는 보살님이 남아 있는 몇 사람에게 방석 까는 일을 도와달라고 했다. 그날은 사람이 무척 많이 온다면서 큰 법당 전부에 방석을 빽빽하게 깔았다. 300개는 되지 않을까 싶었다. 봉사 대가로 손목 염주와 필사할 수 있는 금강경 책을 주셨다. 그 염주를 손목에 끼고 내려오는 길에 백담사 법당에 들어가 참배했는데, 그곳 보살님이 내 염주를 보고는 “봉정암에서 자원봉사하셨나 봐요”라고 금방 알아보았다.
법당을 나와 사리탑에 올랐다. 날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연무가 흘러가면서 아름다운 산의 모습을 가끔 보여주었다. 용아장성릉도 살짝 볼 수 있었다. 아침 공양을 마치고 오도경 님과 다시 사리탑에 올랐는데 연무는 짙어지면서 주변 풍경을 더 숨겼다. 오도경 님이 잣나무 열매가 달린 것을 발견해 같이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절을 내려가지 바로 전에는 일행 거의 전부와 함께 또 사리탑에 올라 탑 앞에 합장하고 사진을 찍었다. 탑은 커다란 바위를 지대석으로 삼아 그곳에 직접 연꽃 무늬를 새기고 그 위로 5층으로 쌓였다. 이때도 연무는 커튼을 걷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에 다시 본 쌍용폭포는 기대대로 밤새 내린 비로 전날보다 몇 배는 더 풍성해졌다(08:15). 그곳에 한참 머물며 폭포를 즐겼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돌아가며 소감 나누기를 했는데 모두가 꿈 같은 산행을 했다며 고마워했다. 산행을 기획하고 추진한 최진아 국장과 1박 2일 일정에서 부처님을 더 간절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신 진화 스님에게 특별히 더 고맙다는 말씀을 드린다. 멋지고 갚진 추억을 이쁘게 만들었다.
(2025. 6. 26. 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