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축산농가가 축협으로부터 장기간 사료를 외상으로 구매하는 약정을 하였다. 외상에 대한 이자 약정은 따로 하지 않았고, 거래가 중단된 때에 외상 잔금에 대해 연 13%의 지연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5년여 지나 거래가 중단되었고, 외상잔금은 2억원이었다. 축협은 근저당권을 설정 받은 부동산에 대해 경매를 진행하여, 자신이 주장하는 채권금액을 모두 받았다. 다른 채권자는 위 배당절차에서 축협보다 후순위라 채권의 만족을 얻지 못했다.
그 후 축산농가가 위 채권자에게 축협이 배당절차에서 실제보다 많은 채권을 주장하여 부당하게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 위 채권자가 내게 사건을 의뢰하였고, 난 축협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쟁점은, 거래가 중단되기 전에도 이자를 지급하여야 하느냐 여부였다. 난 거래기간 중에는 이자를 지급하지 않기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고, 상대방은 이자율의 약정만 없는 것일 뿐 상법에서 정한 연 6%의 법정이자를 지급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재판에서, 판사는 피고에게 원고의 청구금액을 다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했다. 판사가 이런 심증을 드러내는 것이 바람직하지는 않으나, 원고로서는 나쁠 이유가 없다.
두 번째 재판에서, 판사는 피고가 주장하지도 않은 민법 규정을 들어, 그에 의하면 축산농가가 이자를 지급해야 해서 원고에게 불리할 수도 있으니, 원고와 피고에게 검토해보라고 하였다. 승소를 예감했던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판사는, 변론주의 원칙상, 당사자가 주장하지 않으면 위 민법 규정은 적용할 수 없다고 하였다. 변론주의는 당사자가 법정에서 주장한 내용이나 제출한 증거가 아니면 재판의 근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재판이 끝난 후, 상대방은 판사가 말한 민법 규정에 따라 정당하게 이자를 받은 것이므로 부당이득이 없다고 주장하는 서면을 제출하였다. 결과적으로 판사가 방어방법을 알려준 꼴이 되었다. 난 위 민법 규정은 이 사안에는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와 함께 판사가 먼저 위 민법 규정을 언급하여 피고에게 주장의 근거를 제공한 것은 변론주의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서면을 제출하였다. 이것이 판사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을까 걱정되었다.
세 번째 재판에서, 판사는, 우려했던 대로, 내가 변론주의 위배를 언급한 것에 대해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나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다. 판결을 내려달라고 했다. 판사는 변론주의 위배라고 그렇게 세게 적어놓았는데 어떻게 판결을 하느냐고 했다. 그리고 이번 사안은 변론주의에 반하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 난 입장을 달리한다고 했다. 판사는 화를 내며, 그러면 자신에 대해 기피 신청을 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재판을 끝내지 않으려고 했다. 변론주의 위배 여부가 앞으로 항소심에서 논의되는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일까?
자신의 법률적 견해가 맞다고 판단하면, 그 상황에서 판결을 선고하면 될 일을, 감정적으로 기피 신청까지 하라며 재판을 끝내지 않으려는 판사의 태도가 몹시 불쾌하고 오만하게 느껴졌다. 실제로 법정에서 이와 비슷한 사례는 흔하게 일어난다.
지난 2일 국회의원 161명이 국정농단 혐의로 임성근 부장판사에 대해 탄핵소추를 발의했다. 최종 결론은 헌법재판소에서 나올 터인데, 절대자처럼 오만하게 군림하려는 판사의 태도가 바로잡히는 한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