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 관리자 | 등록일 : 2023-02-14 | 조회수 : 1252 |
어제(2. 13.) 국민참여재판에서 만장일치로 무죄를 받았다. 2008년 이 제도가 도입될 때 서울중앙지검에서 국민참여재판 1호 검사였는데, 이제 변호사로서 무죄를 받으니 감개가 무량하였다.
국민참여재판은 도입된 지 15년이 되었지만, 아직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일반 시민이 무슨 재판을 해?”라는 기득권 세력의 거부가 큰 탓이지만, 일반 시민 다수도“내가 어떻게 재판을 해?”라는 소극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도록 세뇌당하고 있다. “너희들은 언제나 지배를 받아야지, 언감생심, 무슨 재판을 해?”라고.
오전에 배심원 선정절차를 진행했다. 후보자가 50명 정도 법정에 왔다. 예비배심원을 포함하여 8명을 추첨하여 자리에 앉도록 했다. 검사가 먼저 질문했다. 질문과 답변을 통해, 배심원으로서 공정하게 판단할 수 있는지 가리는 절차다. 검사는 후보자 모두를 상대로, “...한 분 계신가요?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라고 질문했다. 이렇게 해서는 후보자의 생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난 후보자 개인에게 직접 물었다. “국민참여재판이 도입된 지15년이 지났는데 아직 배심원의 평결에 구속력이 인정되지 않고 있다. 배심원이 무죄 평결을 해도 법관이 유죄 판결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물으니, 중년 남성인 후보자는“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제도적으로 정할 문제 아닌가요”라고 했다. 쉽게 답하기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
다른 젊은 여자 후보자에게 물었다. “갑이 을을 죽였다고 기소되었다. 검사가 갑이 을을 죽였다고 입증해야 하는가, 아니면 갑이‘을을 죽이지 않았다’고 입증해야 하는가?” 그녀는 작고 조심스런 목소리이긴 하지만, 분명하게 “검사님이 입증해야 하지요”라고 했다. 선정절차에서는 이렇게 후보자를 내 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앞서 검사가, “유무죄를 판단할 때 피해자의 느낌을 중요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그렇게 해야 한다”라고 답한 중년 여성인 후보자가 있었다.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그녀를 상대로 질문을 던졌다. “피해자의 느낌이 중요하긴 하지만, 피해자가 아주 예민한 성격이거나 사건 당시 몹시 흥분한 상태이면 그 판단이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지 않은가? 이런 때는 피해자의 느낌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해야 하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그녀는 내 말에 공감했다.
난 후보자를 기피하지 않았다. 특별히 거부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검사는 한 명을 기피하여, 다시 한 명 더 추첨하여 질문과 답변 절차를 거쳤는데, 특별한 문제가 없어 그 사람이 배심원이 되었다. 법에 정한 배심원은 7명이지만, 8명을 뽑는다. 1명은 예비배심원이다. 혹시라도 7명 가운데 누가 심리과정에서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없는 사정이 생기면 예비배심원이 정식 배심원이 되는 것이다. 누가 예비배심원인가는 평의에 들어갈 때까지 공개되지 않는다.
갑과 을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2021년 가을, 코로나가 아직 영향력이 있을 때, 수학여행 가는 문제로 서로 다투었다. 갑은 코로나 문제로 교육청 공문까지 있으니 ‘취소’ 의견이고, 을은 그래도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연기’ 입장이었다. 어찌 보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는데, 둘은 평소에도 사안을 놓고 자주 입장이 갈렸다.
이날은 언쟁이 심했다. 교감이 나서 말려도 둘은 듣지 않았다. 말다툼이 끝나고 갑이 교무실 밖 냉장고로 갔다가 다시 교무실 안으로 들어오는데, 마침 을이 교무실 밖으로 나가려고 하였다. 출입문 안쪽은 한쪽에 복사기가 있어 매우 좁았다. 교행이 어려웠다. 그런데 그곳을 지나다가 서로 부딪쳤다.
을은 갑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왼쪽 젖가슴을 쳤다며, 강제추행, 폭행으로 고소했다. 갑은 자기가 먼저 좁은 공간에 들어섰는데, 을이 무작정 그 공간으로 들어와, 자신이 피하다가 부딪친 것이라고 하였다. 검사는 강제추행의 고의는 없다며 폭행에 대해서만 기소하였다. 폭행은 과실범 처벌 규정이 없다. 폭행의 고의가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었다.
을은 사건 당시 교무실에 있던 연구부장 병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병은 경찰에서 자신이 유심히 지켜봤는데, 갑이 의도적으로 을을 쳤다고 말했다. 검사는 병의 말을 근거로 기소한 것이다. 갑이나 그의 변호인이 나로서는, 병의 진술을 어떻게 탄핵하느냐가 뚫어내야 할 과제였다.
을은, 법정에서, 예상한 대로, 단호하게 갑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왼쪽 가슴을 쳤다고 증언했다. 그런 그녀를 탄핵하기란 쉽지 않았다. 다만, 당시 그녀가 갑과의 언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는 진술 정도만 유리하게 끌어냈다. 흥분했다면, 주관적인 감정에 빠져, 상황을 제대로 볼 수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병인 증인석에 앉았다. 갑은, 최근에 을과 병의 사이가 틀어졌다고 했으나, 병은 경찰 진술대로, 갑이 의도적으로 을을 쳤다고 했다. 이미 말다툼이 끝난 상황인데, 갑이 교무실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어떻게 자세히 볼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병은 당시 상황이 심각하여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방청석엔 내 아들과 딸이 있었다. 미리 집에서 사건에 대해 이야기른 나누었는데, 자기들도 재판을 보고싶다고 했다. 아이들은 “우리가 가도 부담 안 돼?”라고 물었는데, “그런 경지는 벗어났다”고 했다. 그래도 조금은 부담이 됐다.
검사는 한 곳에 서서, 준비한 신문사항을 읽으며 신문했지만, 난 손 마이크를 들고 자리를 오가며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신문했다. 가끔 배심원들에게도 눈길을 주며 그들의 반응을 살폈다. 사소한 말 하나, 몸짓 하나가 배심원들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 이건 내가 검사 때 영국 케임브리지, 런던, 미국 뉴욕에서 배심재판을 보면서 공부한 것이다.
을과 병에게 아킬레스건이라고 볼 만한 게 있었다. 병의 진술서였다. 이것은 경찰에 제출한 것인데, 을이 작성한 고소장과 글씨체나 크기, 문단 형태가 똑같았다. 을을 상대로, 그것을 지적하면서 물으니, 자기는 병의 진술서 작성이나 제출에 전혀 관여한 것이 없다고 했다.
병을 상대로도, 같은 취지로 물었다. 그런데 병은, 뜻밖에도, 진술서는 자기가 작성한 것은 맞는데, 을에게 주었다고 했다. 을의 진술과 어긋나는 것이다. 을은 병의 진술서 제출에 전혀 아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병은 을에게 주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확인하니, 을은 고소장에 병의 진술서를 첨부하여 제출하였다. 을의 진술을 토대로, 계속 추궁하니, 병은 그 진술서를 자신이 경찰에 제출했는지, 아니면 을에게 주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났어도 혼동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었다. 여기서 게임이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병은 더이상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증인이 아니게 된 것이다.
최종 변론에서 이 부분에 초점을 두었다. 배심원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피고인에게 폭행의 고의가 있었다는 것은 검사가 입증해야 하고 그 입증은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치로 따져서, 피고인에게 폭행 고의까지는 없었던 건 아닐까, 연구부장인 병이 을을 위해 사실과 다르게 진술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면, 배심원 여러분은 유죄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배심원들은 2시간 가까이 평의를 했다. 여러 사람이 토론을 하면 합리적인 결론에 다다를 가능성이 높다. 저녁 7시 50분에 선고한다는 연락을 받고 법정에 들어서니, 배심원들도 하나 둘 법정에 들어왔다. 그들은 결론을 알고 있다. 그들의 눈치를 살피는데, 그들은 내 눈길을 피하는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기도 하였는데, 그 예감을 믿지 않기로 했다. 판사들이 들어왔다.
판사는 배심원 대표로부터 평의 결과를 받았다며 봉투를 열어 서류를 꺼내 잠깐 보더니 다시 넣었다.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무죄 평결을 했고, 재판부도 이 결론에 동의합니다. 피고인은 무죄.”
나와 피고인은 배심원들에게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우리도 좋은 결과로 뿌듯함이 있었지만, 배심원들도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라 여겼을 것이다.
전에, 이 사건을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하기로 하면서, 재판장은, 법정에서, ‘당시 검사가 참여재판을 아주 잘하는데 그가 인사 이동으로 다른 곳으로 가니, 피고인은 행운’이라고 하였다. 그런 재판장이, 이날 변호인이 하는 변론을 보고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난 유죄를 받았어도, 후회가 없을 만큼, 내가 할 바를 거의 다 했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법정 여기저기를 오가며, 자연스럽게, 배심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했다.